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브룬힐트의 승리와 아들들의 내전 ====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녀는 일찍이 아들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아내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성 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하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고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라고 거짓말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론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시를 내렸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610년,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가로쟀다고 한다. 빌리헬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랐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리푸아리 백성들이 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테우데리크 2세는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사망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그가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질병)|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